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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희_난장이가쏘아올린작은공_마술적사실주의
조세희_작가_소설가
조세희_난장이가쏘아올린작은공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대문호이자 거물 조세희 선생님의 필독도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다시 살펴 보려 한다.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이 어떻게 사용됐는지 살펴 보자. 

 

I. 서론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근대화과정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우리의 어두운 자화상을 들여다보게 한 1970년대 현실에서 조세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연작을 발표한다.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돛대 없는 장선」으로 등단한 이후 작품을 발표하지 않던 그가 10년 만에 소개한 책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연작이다. 1975년에서 1978년까지 3년에 걸쳐 발표한 연작 가운데 맨 처음 작품은 1975년 발표한 「칼날」 이다. 다음해인 1976년에는 「뫼비우스의 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우주여행」을 내놓았으며, 1977년 「육교위에서」, 「궤도회전」,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에 이어 1978년 「클라인씨의 병」,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에필로그」를 발표하면서 연작을 마무리 한다. 물론 작품의 연관성을 고려해 작품집의 게재 순서는 다소 뒤바뀌기기도 한다. 이렇듯 1970년대 중후반에 연이어 발표한 『난쏘공』 작품집은 1970년대 열악한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다.

『난쏘공』은 열악했던 시대상을 좀 더 부각하기 위해 마술적 서사기법을 사용하였다. ‘마술적 사실주의’란 용어는, 1925년경 발생한 후기 표현주의 회화를 지칭하기 위해 예술 비평가 프란츠 로가 맨 처음 사용했다. 그는 이 용어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마술적’이라는 말은 ‘신비적’이라는 말의 반의어라고 말한다. 프란츠 로는 “신비는 재현된 세계로 내려오지 않고 오히려 그 뒤에 숨어서 고동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마술의 문학이 아니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목적은 감정 표현이지 감정 환기가 아니므로 마술의 목적과 다르다. 무엇보다도 마술적 사실주의는 일종의 현실에 대한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대중 문학이나 고급 문학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조탁된 문체나 통속적 문체로 표현될 수도 있으며, 닫힌 구조나 열린 구조로 표현될 수 있다.

 

마술적 사실주의 개념에 대한 수많은 비평적 이견이 존재하지만, 많은 마술적 사실주의 텍스트에서 공통적으로 되풀이되는 요소가 하나 있다. 의사소통상의 필연적 결함이 기표와 기의의 일치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의식이다. 아마도, 마술적 사실주의 같은 ‘보완’의 형식은 치열하게 노력을 해봤자 결국 실패할 뿐이라는 딜레마를 안고 있는 듯하다. 마술적 수단을 이용하여 ‘완벽한’ 의미작용의 가능성을 증대시키는 노력, 텍스트를 그럴 듯하게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노력을 한다 해도 말이다. 어차피 텍스트는 비사실적 구조물일 수밖에 없다. 로즈매리 잭슨은 “‘사실성’이란 말 자체가 문제투성이이기 때문에 어떤 서사의 내적 사실성 여부를 판단하는 일은 결국 환상적인 행위이다”라고 주장한다. 의미작용에서 ‘사실성’이라는 용어를 거론하다 보면 외견상으로는 언어 구조물과 이 언어 구조물이 재구성한 대상간의 차이를 소멸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초현실주의 회화가 그린 사과는 인위성이 역력한데도 불구하고 인상파 기법의 사과보다 더 ‘사실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마술적 사실주의 작가들은 과도한 불신을 주는 것을 피하려고 독자에게 친숙한 사물을 골라 특이한 방식으로 제시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나타난 하늘을 나는 돗자리, 나보코프의 나비 떼, 집단적 기억상실증 등이 그 예로 사물의 고유한 마술적 속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낯설게 하기’라고 부른 기법을 사용하는 셈이다. 너무나 친숙한 것이라 종종 간과해버리는 현실의 일상적 요소들을 극단적으로 붂시키는 기법이 ‘낯설게 하기’이다. 일련의 보완적 환영을 통해 ‘낯설게 하기’ 글씨기 전략은 좀 더 사실적인 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같은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은 조세희의 『난쏘공』에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고는 『난쏘공』에 나타난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을 탐구하여 그 메타포를 찾고자 함에 있다.

 

 

II. 마술적 장치

1. 뫼비우스 띠와 클라인씨의 병

 

실존적 고뇌는 초현실주의적 유희 때문에 시각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조세희는 『난쏘공』에서 상징적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작가가 원하는 마술적 이미지를 구축하고, 현살과의 정면대결을 피해가고 있다. 그 중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의 소재적 상징성을 파악하는 것과, 각각 단편인 두 이야기의 유기적인 관계를 해명하는 것은 『난쏘공』 연작의 의미를 파악하는 주요 기제가 될 것이다.

연작의 단편으로써 첫 번째에 소개되어 있는 작품 「뫼비우스의 띠」는 『난쏘공』의 중심 테마를 담고 있는데, 이 작품은 관념과 현실을 교묘히 조립한 특이한 구조이다. 관념적 세계는 현실의 메타포 기능을 수행하며 마술적 특성을 부각시킨다. 시작 부분과 마지막 부분의 교사의 질문과 설명은 관념적이며, 중심부를 차지하는 ‘앉은뱅이’와 ‘꼽추’의 이야기는 관념적 메타포를 구체화한 현실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난쏘공』 연작의 이야기를 전해하는 것이다. 열 두 편의 연작 소설의 이야기는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이라는 현실의 메타포에 의해 수렴된다. ‘한 번 꼬아 양끝을 붙이면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즉 한쪽 면만 갖는 곡면’이 되는 뫼비우스의 띠와 ‘안팎이 없고 닫혀 있는 공간’인 클라인씨의 병은 안이 곧 밖이며 갇혀 있다는 것 자체가 착각이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즉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은 현실 세계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치이다. 그러한 장치는 우리 삶이 타자의 삶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 신체적 비정상으로 간주되는 ‘꼽추, 앉은뱅이, 난장이’의 삶이 ‘정상인’의 삶의 다른 모습임을 직시하여야 함을 나타내는 소설적 장치이다. 이상과 현실의 대결, 이상 추구의 실패로 작품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앉은뱅이, 꼽추가 쫓는 반딧불, 수학 교사의 우주여행, 지섭과 윤호 등 작중 인물의 의식적 활동 등 이상 세계의 추구는 계속됨으로써 현실과 이상의 반복되는 끊임없는 순환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냉혹한 현실에 살고 있는 소외 계층이 열망하는 이상 세계가 될 수 있고, 또 그 이상 세계가 다시 냉혹한 현실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뫼비우스의 띠’가 암시함으로써 현실과 관념적 이상 세계간의 구별을 무의미하게 한다. 결국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이분법적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을 극복하려는 이상 세계를 향한 강렬한 열망과 현실과 이상이 순환되는 열린 세계로의 가능성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두 아이가 굴뚝청소를 했다. 한 아이는 얼굴이 쌔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그을음을 전혀 묻히지 않은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다. 제군은 어느 쪽의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13쪽)

 

두 아이는 함께 똑같은 굴뚝을 청소했다. 따라서 한 아이의 얼굴이 깨끗한데 다른 한 아이의 얼굴은 더럽다는 일 은 있을 수가 없다. (중략) 종이는 앞뒤 양면을 갖고 지구는 내부와 외부를 갖는다. 평면인 종이를 길쭉한 직사각형 은 오려서 그 양끝을 맞붙이면 역시 안과 겉 양면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한번 꼬아 양끝을 붙이면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즉 한쪽 면만 갖는 곡면이 된다. 이것이 제군이 교과서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이다. 여기서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곡면을 생각해보자. (15쪽)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했다는 동일한 상황 하에서 결과는 각각 다르게 나타났다. 한 아이는 얼굴이 깨끗하고, 다른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다. 같은 상황에 놓인 두 아이는 서로 정 반대의 위치에 놓인 결과를 낳았다. 서로 동일한 면에 존재하지만 각각 서로 비틀린 위치에 존재하는 현실. 이것이 바로 뫼비우스 띠가 보여주는 우리의 현실적인 모습인 것이다. 그렇지만 1970년대 현실에서 뫼비우스 띠와 같이 앞뒷면이 구별이 없어서 결국은 서로 만나게 되는 도형의 모습은 우리가 그렸던 이상적인 모습이지 실현 가능한 모습은 아니었다. 이것은 ‘뫼비우스 띠’라는 상징적 매체를 통해 현실과 환상의 상반된 구조를 보여주며 또 한편으로는 ‘뫼비우스 띠’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액자 구성의 형식적 특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과학자는 그것을 클라인씨의 병이라고 했다. (중략) 실체가 내 눈앞에 있는데 그 실체를 무시하고 상상의 세계에서 만 그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럼 이것은 뭡니까?” 내가 물었는데 그는 간단히 “그것은 없다”고 잘 라 말했다. (259-260쪽)

 

유리 대통으로 병을 만들고, 그 원기둥의 한쪽을 넓게 하고 그 반대쪽을 좁게 변형시킨 다음 벽에 구멍을 뚫어 한쪽 끝을 그 구멍에 넣어 만든 것이 클라인씨의 병이다. 이것은 독일의 수학자 펠릭스 클라인이 순전히 논리의 결과인 추상적인 측면에서 연구하여 발표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안팎이 없는데 닫힌 공간이 있으며, 내부라는 개념이 없다. 내부와 외부라는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점에서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은 공통된 특성을 갖고 있다. 내부와 외부의 구별이 없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표면을 걷다보면 결국은 서로 만나게 되는 도형의 특징처럼 작가가 바라는 이상적 유토피아는 2차원과 3차원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1970년대 우리 현실은 그 구별이 너무나 뚜렷했고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대안은 작가의 상상력과 함께 이상향으로 빠져드는 길 외엔 없었던 것이다.

 

끝으로 내부와 외부가 따로 없는 입체는 없는지 생각해보자. 내부와 외부를 경계 지을 수 없는 입체, 즉 뫼비우스 의 입체를 상상해보라. 우주는 무한하고 끝이 없어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을 것 같다. 간단한 뫼비우스의 띠 에 많은 진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29쪽)

 

수학교사가 역설하는 이상적인 세계는 닫힌 세계인 2차원의 곡면이 아닌, ‘내부와 외부가 따로 없는’ 열린 세계인 3차원의 입체에 대한 추구이다. 즉, ‘뫼비우스의 띠’가 상징하는 세계는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무한하고 영원한 세계로 외부와 내부의 구별 자체가 무의미한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공존 가능한 세계를 의미한다. 1970년대 현실에서 실현하고 싶지만 실현할 수 없는 이상적 세계에의 바람을 조세희는 ‘뫼비우스의 띠’라는 상징적 소재를 통해 드러낸 것이다. 또한 그것은 ‘클라인씨의 병’과도 일치한다.

결국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이분법적인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을 극복하려는 이상 세계를 향한 강렬한 열망과 현실의 이상이 순환되는 열린 세계로의 가능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2. 달나라와 릴리푸트읍

 

달나라에는 계수나무가 있고, 토끼가 산다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우리들에게 꿈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꿈은 과학의 발달로 인간이 달에 실제로 다녀온 후에도 여전히 그 효력을 발휘한다. 달나라는 우리 인식 속엔 적어도 이상 세계, 지구와는 다른 이상적인 곳이라는 이미지가 살아 있다. 유토피아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난장이와 난장이 가족들은 늘 지옥과 같은 현실에 살면서 천국을 꿈꾼다. 애써 지은 집은 정당한 댓가의 지불없이 헐려 버리고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한 시도도 역시 집안 식구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어버리자 난장이의 의식은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 세계로 향하게 된다. 난장이는 괴로울 때마다 달나라로 작은 쇠공을 쏘아 올리지만 그 공은 지구로 다시 떨어지고 만다. 난장이가 추구한 유토피아인 달나라와 현실 세계는 서로 연관성을 갖지 못하고 동떨어져 대립함으로써 실제적 가능성을 지니지 못한 채 추상적인 유토피아로 남게 된다.

 

그는 처음으로 달나라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 했다. 달은 순수한 세계이며, 지구는 불순한 세계라고 했다. (중략) 그는 달에 세워질 천문대에서 일할 사람은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달은 황금색의 별세계였다. 그는 지상 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너무나 끔찍하다고 했다. 그의 책에 의하면 지상에서는 시간을 터무니없이 낭비하고, 약속과 맹세는 깨어지고,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중략) 그날 밤 윤호는 우주인이 창 밑에 와 유리문을 두드리는 꿈 을 꾸었다. 벽돌 공장의 굴뚝위에 올라가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난장이의 꿈도 꾸었다. (66-67쪽)

 

지섭과 난장이, 윤호는 같은 꿈을 꾼다. 난장이는 공장 굴뚝 꼭대기에 올라가 달나라를 향한 종이 비행기를 날렸고, 윤호는 지섭에게 우주여행과 달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창 밑에서 문을 두드리는 우주인과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난장이를 꿈에서 본다. 행복동 시절 이들은 같은 꿈을 꾼 것이다. 위에서 희망을 암시하는 달, 우주인, 종이비행기 등은 현실을 그리는 축자적 문맥과 부조화된 파편들로 형상화되고 있다. 달에 가서 천문대 일을 보겠다던 아버지는 벽돌공장 굴뚝에서 떨어져 세상을 떠났다. 희망의 표현이 부조화된 파편들로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희망이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며 알레고리의 무시간적 크로노토프 속에서만 현실의 음화인 죽은 역사에 저항할 수 있음을 뜻한다.

 

“네가 시험에 떨어진 이유를 알았어.”

“말해봐.”

“우주인이 왔었어. 그가 네 답안지를 훔쳐가버렸어.”

“어마! 그랬었구나.” 은희는 웃지 않고 말했다.

“그런데 그 우주인이 왜 내 답안지를 훔쳐갔을까?” (71쪽)

 

우주인이 답안지를 가져가는 바람에 대학입시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자연스러운 서사를 방해하지만 독자가 의심을 품게 하지 않으며 그들 대화의 의미를 이내 파악한다.

부조화된 파편이 자연스런 서사를 방해하는 것은 그러한 서사의 비동일성의 의식을 가진 사람의 내면공간에 상응하는데, 마술적 세계로의 도피가 여기서 이루어진다. 제멋대로의 공간적 이동과 서사와 상관없는 상황의 끼어듦은 등장인물 중 어느 누구의 반감도 사지 않으며, 독자도 의심의 여지를 품지 않으며 인물들의 내면 의식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한 무시간적 공간의 설정은 다분히 알레고리적이며 마술적 사실주의를 창조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뭐가 잘못된 게 분명하죠? 불공평하지 않으세요? 이제 죽은 땅을 떠나야 합니다.”

“떠나다니?”

“달나라로!”

“애들아!”

어머니의 불안한 음성이 높아졌다. 나는 책장을 덮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영호와 영희는 엉뚱한 곳을 찾아 헤매 고 있었다. 나는 방죽가로 나가 곧장 하늘을 쳐다보았다. 벽돌 공장의 높은 굴뚝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 맨 꼭대 기에 아버지가 서있었다. 바로 한 걸음 정도 앞에 달이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피뢰침을 잡고 발을 앞으로 내밀었 다. 그 자세로 아버지는 종이 비행기를 날렸다. (103쪽)

 

그들은 꿈과 현실이 화해할 수 없는 현실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달나라를 꿈꾼다. 난장이 가족의 삶은 ‘우주여행’과 ‘달나라’라는 초현실적 이상 세계의 정반대편의 존재한다. 이것은 난장이 가족의 실제 삶의 리얼리티를 더욱 강화시켜준다. 유토피아는 도피가 아니며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비전이 희망으로 제시되는 곳이다. 현재보다 나은 이상적인 세계를 공통의 충동과 염원을 갖고 미래지향적인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 유토피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난장이가 바라는 이상 공간은 유토피아의 구체적 공간이라기보다는 정신적 도피처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 공간을 등장인물들의 내면 의식의 흐름을 통해 현실 바로 옆에 위치하게 된다. 결국 난장이는 달과 가장 가까운 굴뚝에서 자살함으로써 이상에 가까이 간 듯하지만, 이것은 영원한 절망이가 패배가 되고 말았다. 난장이의 죽음을 통해서만이 ‘까만 쇠공’은 하늘을 가로 질러 날아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행복동 철거민인 난장이가 소망했던 그 곳은 비극적 유토피아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또한 실제 존재하지 않은 데서 오는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달나라’라는 초현실적 공간은 등장인물이나 독자에서 ‘망설임’을 주지 않으며, 난장이의 현실에 동화되지 않음으로써 마술성을 획득한다. 난장이의 달나라를 향한 꿈은 마치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그리워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 등장인물의 내면 의식이 현실과 초현실을 수시로 넘나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쏘공』에서 넘나드는 자연과 초자연 사이의 간극을 독자는 충분히 짐작하며, 그것이 등장인물의 의식의 흐름 속에 존재하거나, 꿈 속에 존재하거나, 또는 작가의 간절한 바람의 환각이거나 독자는 그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난장이의 달나라를 향한 비상은 곧 이루어질 수 없는 절망, 지구 위로 추락이었다. 이는 마술적 세계를 만들었고, 현실의 절망을 더 부각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낭만적이고 희망적인 시적 세계는 불행히도 현실을 견디도록 도와주는 거짓말이며 냉혹한 현실에 대한 속임수이다. 윤리적으로 선한 난장이가 현실에선 패배하는 것. 그것이 근대사회의 논리인 것이다. 행복동을 떠나 난장이 가족이 정착한 은강은 착취와 억압, 불공평, 폭력이 난무하여 노동자가 고통받는 불건전한 땅이었다. 난장이가 제시한 유토피아가 ‘사랑’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강조한 유토피아라면 영수가 지향하는 바는 이보다 더 구체적이고 보완된 실천적 형태로서 이성과 교육의 중요성을 말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공간으로 영희가 제시한 릴리푸트읍이 있다. 이것은 알레고리적 유토피아 공간으로써 존재하더라도 갈 수 없는 곳이다.

 

릴리푸트읍은 국제 난장이 마을이다. 여러 나라의 난장이들이 그 곳에 모여 살고 있다. (중략) 릴리푸트읍을 제외 한 곳은 난장이들이 살기에 모든 것의 규모가 너무 커서 불편하고 또 위험하다. 난장이들에게 릴리푸트읍처럼 안전 한 곳은 없다. 집과 가구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의 크기가 난장이들에게 맞도록 만을어져 있다. 그 곳에는 난장이의 생활을 위협하는 어떤 종류의 억압, 공포, 불공평, 폭력도 없다. (중략) 여러 나라에서 모인 난장이들은 세계를 자기 들에게 맞도록 축소시켰다. 거인들이 사는 곳에서는 너무 불행했었다. (195-196쪽)

 

조세희는 일원적인 세계를 모색한다. 난장이가 살고 있는 세계는 난장이, 꼽추, 앉은뱅이들과 은강 그룹 경영자들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에 의한 이분화된 곳이다. 이 벽은 너무 견고하고 단단해 쉽게 넘을 수 없으며 그것은 한 세대에 머물지 않고 대를 이어간다. 그래서 난장이는 ‘릴리푸트읍’처럼 난장이들의 작은 힘으로 유지되는 일원적인 세계를 구축하기를 희망하는데 그러한 곳은 현실에는 없다. 이것을 현실에서의 구체적 공간으로 실현하고자 한 이가 난장이의 큰 아들 영수이다.

 

영희는 졸음을 못참아 눈을 감았다. 두 눈은 감은 채 직기 사이를 뒷걸음쳐 걷고 있었다. 그 밤 작업장 실내 온도 는 섭씨 삼십구 도였다. 은강 방직의 기계들은 쉬지 않고 돌았다. 영희의 푸른 작업복은 땀에 젖었다. 영희가 조는 동안 몇 개의 틀이 서버렸다. 반장이 영희 옆으로 가 팔을 쿡 찔럿다. 영희는 정신을 차리고 죽은 틀을 살렸다. 영 희의 작업복 팔 부분에 한 점 빨간 피가 내배었다. 새벽 세 시였다. (218쪽)

 

그들은 아버지를 보고 웃었다. 영호는 그들이 다니는 길 밑에 지뢰를 만들어 심겠다고 말했었다. (중략) 영호가 심 은 지뢰 터지는 소리를 나는 꿈속에서 듣고는 했다. 그들의 승용차는 불길에 휩ᄊᆞ였다. 불 속에서 그들이 울부짖었 다. 꿈속에서 들은 것과 같은 울부짖음 소리를 나는 은강에서 들었다. 알루미늄 전극제조 공장의 열처리 탱크가 폭 발했을 때였다. (중략) 겨우 살아난 공원들은 동료의 잘려진 옆에서 울부짖었다. (219쪽)

 

 

그러나 이들의 상상적 탈출 행위는 그들의 패배로 귀결된다. 종이 비행기를 날리던 난장이가 죽음으로 추락했고, 영수는 사형이라는 현실적 책임을 짊어진다. 영수와 지섭, 윤호의 사회변혁을 향한 구체적 유토피아는 모두 일정하게 유지되지는 않는다. 구체적 유토피아란 ‘추상’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과학’ 또는 유토피아를 향한 사회변혁의 과정을 거치는 끊임없는 극복과 대안의 모색이어야 한다. 그러나 영수는 변혁 초조증으로 은강그룹 회장 동생을 살인함으로써 사형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은 보다 구체적인 과정을 경유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추상적 유토피아’의 모색에 머물고 말았다. 마술적 세계를 창조했던 작가의 의도가 미학적 시도에 그치는 한계가 여기에 있다.

 

 

3. 시간의 공간화

 

『난쏘공』의 인물들은 사회 환경과 적극적으로 상호 작용하지 못하는 소외와 단절감을 화자의 잦은 이동과 내면 의식의 서술을 통해 보여준다. 또한 과거와 현재 장면이 서로간의 담론적 매개항 없이 곧바로 연결됨으로써 사건의 시·공간보다는 주관적 의식 세계에 보다 더 초점을 두고 있는데 이것이 시간의 공간화 기법이다. 이 기법은 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난쏘공』은 엄밀한 의미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결합 형태를 드러내기도 한다.

『난쏘공』의 각각의 단편에서는 현재와 과거가 자유자재로 교차하면서 현재의 사건 서술보다는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따른 과거 장면의 서술이 많이 차지한다. 이러한 이야기 진행 방식은 서사의 자연스런 흐름을 방해하고 일정한 은유적 사물을 통해 예고 없이 시간을 넘나듦으로써 독자들을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하게 하고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이것은 외부 현실과 단절된 인물의 입지와 소외감을 보여주며 현실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소설이 서사 문학이며, 서사의 시간적 측면에서 볼 때 『난쏘공』은 자연스러운 서술의 흐름이 단절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주로 과거의 한 부분이 삽입되는 상황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시간의 불연속성은 주인공의 갑작스러운 회상이 연속적인 두 문장 사사이에 끼어드는 양상으로 보인다. 시간의 자연스런 흐름이 일순간 단절되며 새로운 서사가 시작되는 것은 하나의 단어, 또는 문장을 매개로 현시점과 전혀 다른 시간의 장면이 나타나는 것을 반복한다.

 

“그 돈이 보통 돈이우.”

“알고 있어요. 명희 생각을 하면 가슴이 메어져요.”

나도 마찬가지였다.

“명희 언니.”

영희가 소리쳐 불렀었다.

“놀러 와. 우리집에 놀러 와.”

“새 집이라 좋지?”

“응.”

“네가 장독대에 써놓은 거 지우지 않으면 너희 집에 놀러가지 않을 거야.”

“지울 수가 없어”

“왜?”

“세멘이 굳어져서 못 지워.”

“그럼 난 안 가.”

영희는 몹시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명희를 만났다. 그때는 방죽 오른쪽은 숲이었다. (중략) 그 때의 명 희에게는 그 이상의 것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명희가 자라면서 다방 종업원이 되고, 고속버스 안내양이 되 고, 골프장 캐디가 되었다. 그 애가 어느 날 핼쑥해진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중략) 명희는 음독 자살 예방 센터에 서 숨을 거두었다. (중략) 그 애가 남긴 예금 통장에 십구만 원이 들어 있었다.

“십오만 원야요.”

명희 어머니가 말했다. (91-94쪽)

 

‘명희’라는 인물을 매개로 시간은 과거의 장면으로 바뀐다. ‘그 때’라는 말을 통해 과거로의 이동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이것은 허구적 서사물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얼마면 팔겠어요?”

“이십오만 원.”

“좋아요. 저녁에 가죠. 이웃에 팔 사람이 또 있으면 싸게 팔지 말고 기다리라고 그래요.”

“조금만 더 기다려라.”

아버지가 말했었다.

“진실을 말하고 묻혀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너희들이 그 꼴이 되었구나. (114쪽)

 

비슷한 대화의 내용이 과거로의 이동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장면이다. ‘기다리다’라는 단어를 영호가 지각하고 아버지와 나누었던 과거의 대화로 이어진다.

이렇게 현재와 과거에 공통된 지각을 매개로 하여 단번에 과거의 한 순간으로 돌아가는 시간 구조는 『난쏘공』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단편에 따라서는 끊임없이 끼어드는 화상시제로 인해 현재의 서술의 흐림이 연속적으로 끊기고 뒤얽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장면의 중첩과 삽입은 자연스런 독서를 방해하는 요인이기도 하며 난해한 설정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것은 작품의 스토리를 아리송한 몽환으로 인도하면서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것은 특히 아버지 세대에 이어 여전히 현실과 가진자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난장이의 세 자녀의 목소리를 통해 두드러지는데, 이들은 억압자로부터 고통을 받으면서도 대결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갖지 못하고, 또한 아버지인 난장이가 지향했던 ‘달나라’와 같은 환상적 공간으로 도피하지도 못하면서 여전히 현실 속에서 긴장과 갈등을 겪는다. 이는 이들이 지적인 각성단계에 들어섰지만, 그들이 처한 여건을 바꾸기 위한 구체적 실천 방안을 발견하지 못하고 헤매는 모습이며 이것은 또한 작가의 방황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는 끊임없는 알레고리를 형성하며 현실에 가까이 가고자하는 노력을 보인다.

19세기 리얼리즘 작품들의 대척점에 서있는 문학기법인 알레고리는 현실적 의미와 대응된다는 점에서 마술적 사실주의의 사실주의적 측면과 맞물려있다. 『난쏘공』 단편의 흐름에서는 우화적 알레고리의 특징적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달나라, 릴리푸트읍, 장님나라로의 전이가 그것이다. 달나라와 릴리푸트읍은 이상 세계에 대한 우화적 접근이다. 이에 비해 장님나라는 은강 노동자들의 현실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결여에 대한 우화적 접근이다. 먼저 달에서 릴리푸트읍으로의 변화는 ‘지구 밖’ 우주에서 ‘지구 안’ 땅으로의 변화는 일단 현실적 접근의 노력이다. 그러나 릴리프트읍은 ‘달’에 비해 현실적 공간이기는 하나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으며 텍스트 안에서 또한 난장이 가족에게는 닿을 수 없는 곳이었으므로 역시 현실적 한계를 지닌 곳이다. 이것에서 한 걸음 더 현실로 다가간 곳이 장님나라이다. 이것은 난장이 가족이 인식한 현실로서 지섭은 장님나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올바른 눈을 갖기 위해서는 단순히 지식만으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이는 1970년대 주체의 현실 인식상의 한계, 즉 현실에 대한 비관적 인식과 구체성을 상실한 추상적 인식에 대한 비판의 눈을 갖는 측면이다. 이처럼 조세희는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현실에 대한 자각과 전복의 노력을 시도한다. 그러나 억압받는 사회적 객체임을 부정하며 스스로가 ‘타자’임을 전복하고자 했던 난장이 아들 영수의 살인 행위라는 작은 구체적 실천도 오히려 ‘사회적 범법자’라는 오명을 쓰는 요인이 될 뿐 상황을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이것은 작품의 초현실적 도피, 특히 사회적 동기를 부여할만한 이유있는 마술적 상황 설정과 전개 방식에 정당성을 실어주는 동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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